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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학산, 이름 속에 숨겨진 이야기 – 산이 된 새, 그 위를 걷는 사람

by TR digital nomad 2025. 4. 20.

 

산은 그저 높은 땅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이 잠시 문명이라는 무게를 내려놓고, 원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부산 서쪽, 조금은 소외된 듯 자리한 그 산, **승학산(乘鶴山)**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학을 타고 오르는 산’. 마치 전설 속 신선이 머물던 산처럼.

나는 오늘, 당신을 그 신화 같은 산으로 데려가려 한다.
지도 속 고도나 등산 코스가 아닌, 감각과 기억, 상상으로 구성된 승학산의 세계로.


승학산은 방향이 아니라 ‘의도’를 선택하게 하는 산이다

대부분의 산은 입구에서부터 의지를 묻는다.
“넌 정상까지 오를 생각이냐, 중턱까지만 갈 거냐?”
하지만 승학산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가르려 하지 않는다.

이 산의 입구는 너무나 일상적이다.
주택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어느새 작은 나무계단이 보이고,
그것이 산의 시작이라는 것도 모른 채 우리는 올라간다.

이게 바로 승학산의 첫 번째 마법이다.
“내가 산에 들어왔는지조차 모르게 산이 사람을 품는다.”

그 순간, 당신은 선택한다.
오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머무르겠다는 ‘의도’를.
여기선 도착보다 머무름이 더 중요하다.


학을 탄 자의 시선 – 승학산 정상에서 본 세계

승학산의 높이는 497미터.
수치로만 보면 험하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하지만 여기가 가진 진짜 매력은 정상에서 마주하는 시선의 변주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론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너머로 을숙도가 안긴 듯 누워 있다.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사하구와 사상구의 아파트들이 바둑판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남쪽엔 멀리 송도 바다가 은은하게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 모든 풍경을 마주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건 학의 눈이다.”

승학산은 높지 않지만, 그 시야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넓고 깊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 세상을 보면 욕심이 줄어든다.
산은 나에게 항상 묻는다.

“저기 보이는 건물 속에서 너는 얼마나 스스로였니?”


도심의 산, 그 외로움에 대하여

승학산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산이지만, 언제나 약간 외로워 보인다.
금정산, 장산처럼 ‘관광산’이 아닌, 조금은 마이너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게 이 산의 진짜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산엔 셀카봉보다 손을 잡은 노부부의 속삭임이 더 많고,
등산복보다 운동화와 편한 바지 차림의 청년들이 더 많다.
관광지가 아닌, ‘하루의 쉼표’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공간.

그래서 승학산은 말한다.

“나는 유명해지지 않아도 돼. 대신 너의 비밀이 되어줄게.”


갈림길, 그 은유

승학산의 매력은 수없이 갈라지는 작은 길들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도 있지만, 중간중간 샛길이 숲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 길엔 표지판도 없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흔적도 없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면, 뜻밖의 벤치 하나와 조용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마치 인생의 사소한 선택이 뜻밖의 평온을 데려오는 것처럼.

도심에선 늘 정답만을 향해 가는 우리지만,
승학산은 이런 샛길에서 **“가끔은 정답보다 조용한 길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겨울의 승학산은 모든 소리를 삼킨다

겨울이 되면 승학산은 유난히 고요해진다.
바람마저 조심스레 가지를 흔들고, 눈이 내린 날엔
그 흔한 새 소리조차 멀어져 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자신의 내면과 처음으로 대화하게 된다.
무언가를 듣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를 끌어올리는 시간.

눈 덮인 승학산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나는 지금, 세상과 멀어졌지만, 나와 가까워졌다.”


승학산이 주는 유일한 보상 – ‘무사히 걸어 나오는 것’

이 산엔 전망대도, 큰 절도, 유명한 약수터도 없다.
그저 숲길, 낙엽, 그리고 계단.
그러나 하산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속이 맑다.

성취감도 아니고, 감동도 아닌,
딱 하나의 감정.

“나는 나를 놓지 않았다.”

승학산은 우리에게 거창한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페이스로 걸을 수 있었던 하루를 돌려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보상이 아닐까.


마지막 문장 – 승학산은 나의 속도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승학산을 오르며 나는 안다.
인생이 등산이라면, 우리는 너무 자주 숨을 참아가며 살고 있다는 걸.
그런데 이 산은 말해준다.

“숨차면 쉬어. 꼭대기 안 가도 돼. 이 길에서 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작성자 주:
이 글은 단순한 등산 후기나 산행 정보가 아니라, 승학산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삶과 감정에 대해 사유한 창작 에세이입니다.
부산이라는 도시 속, 그저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산이지만,
그 안에 담긴 풍경과 감성, 그리고 은유는 그 어느 높은 산보다 넓고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