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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시장, 천 개의 이야기와 천 원짜리 행복이 공존하는 곳

by TR digital nomad 2025. 4. 16.

 

한 도시의 심장을 꿰뚫고 흐르는 것이 강물이라면, 그 도시의 숨결은 '시장'에서 들린다. 부산, 그 거친 바다와 뜨거운 삶의 도시. 그리고 그 중심엔 ‘부산진시장’이 있다.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땐, 단순히 전통시장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몇 발짝만 내딛고 나면, 이곳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온기들이 얽히고설킨 살아 있는 '문화의 숲'이란 걸 깨닫게 된다.

🧭 지도에도 없는 보물찾기

부산진시장은 정확히 어디에 있을까? 그 주소는 분명 부산 동구 범일로에 위치해 있지만, 진짜 이 시장의 좌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잡고 갔던 생선가게, 첫 월급을 쥐고 어머니께 사드린 꽃무늬 앞치마, 혹은 이방인의 눈으로 스쳐간 오묘한 삶의 파편들. 이곳은 GPS로는 찍히지 않는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 단돈 천 원의 마법

요즘 천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의점에서는 껌 한 통도 마음 놓고 사기 힘든 가격이다. 그러나 부산진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달걀 두 개가 노릇노릇 부쳐진 김밥이 천 원,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도 천 원. 무심코 사 들고 나온 고로케 하나에도 어머니의 손맛 같은 따뜻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천 원짜리 음식 하나를 사며 나누는 인사, 웃음, 덤으로 얹어주는 마음. 이런 감정들은 카드결제나 스마트폰 QR로는 얻을 수 없는 ‘정情’의 화폐로만 교환된다.

🌈 진짜 색, 진짜 냄새

부산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감각이 깨어난다. 눈은 색에 취하고, 코는 냄새에 취한다. 곱창구이 냄새가 지나가면 생선 비린내가 밀려오고, 그다음엔 막 볶아낸 떡볶이의 매콤함이 코를 찌른다. 그 사이를 누비는 사람들의 발걸음, 활짝 웃는 상인들의 외침, 그리고 어쩌면 싸우는 듯하지만 정겨운 억양의 사투리.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현장의 생생함, 그것이 이 시장을 찾게 만드는 중독적인 매력이다. 여기선 어떤 필터도 필요 없다. 삶 자체가 가장 생생한 '현실 고화질'이니까.

👘 시간의 옷을 입은 거리

이곳에는 무려 100년 가까운 시간이 쌓여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이 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고, 산업화의 물결을 이겨내며, 어느새 21세기를 버티고 있다. 거리 곳곳엔 예전 간판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몇몇 가게는 3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듯한 간판, 손때 묻은 계산기, 빛바랜 사진 한 장까지. 이 모든 것이 시간의 옷을 입은 예술이다.

디지털 세대에게 낯선 아날로그의 감성이 이곳에서는 정겹게 다가온다. "젊은 친구, 이건 80년도에 처음 들여온 기계라예~ 아직도 짱짱합니더!" 상인의 자부심 섞인 말 한마디에, 사람과 물건 사이의 ‘정(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 인스타그래머블? 여기 진짜가 있다

우리는 종종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곳들을 찾아 다닌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감성카페,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줄 서서 먹는 디저트.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기획된 공간’이다. 부산진시장은 그렇지 않다. 여긴 ‘우연히 피어난 아름다움’이 있다.

빛 바랜 천막 아래 놓인 국화 한 다발, 수세미 그물망 속 찰랑거리는 은빛 생선들, 천 장 가득 걸린 형형색색의 한복과 속치마. 사진으로 찍어도 좋고, 그냥 눈으로 담아도 더 좋다. 여긴 포토존이 따로 없다. 그 자체가 전부 포토존이다.

🎤 시장은 연극이다

부산진시장에선 상인 한 명, 손님 한 명 모두가 무대 위의 주인공이다. 서로 대사를 주고받고, 표정을 짓고, 극적인 반전까지 만든다. 오늘의 주제는 ‘깎아줄게, 대신 단골해줘~’ 혹은 ‘이건 진짜 신랑감 양복이야~’. 어떤 날은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따뜻한 포옹으로 끝난다.

이곳은 연출 없는 살아 있는 극장이다. 그리고 그 관람료는 단돈 0원. 대신 시간과 마음을 조금 투자해야 한다.

🧓 오래된 미래

한 번은 시장 안 작은 의류점에서 일흔을 넘긴 할머니와 마주쳤다. “이 옷, 요즘 애들 스타일도 있어요~ 내가 유튜브도 봐가며 공부하거든요.” 순간, 시장이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곳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유튜브 쇼츠를 찍는 상인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병행하는 젊은 2세대 점주들.

부산진시장은 **‘오래된 미래’**다. 과거를 품에 안은 채,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꿈꾼다. 그 변화는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그래서 여긴 죽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살아 숨 쉰다.

🌱 마치며 – 시장, 그 이름의 다른 말은 '사람'

부산진시장은 그냥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기억의 파편이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끈이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호흡이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나는 몇 안 되는 장소다.

그리고 그 진한 삶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다. 느리지만 정직했던 순간들, 서로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빛, 그리고 "고맙습니다"라는 말의 무게.

이제는 부산진시장을 단순한 '전통시장'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이곳은 ‘살아있는 문화’, ‘움직이는 예술’, ‘인간의 본질’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부산진시장으로 간다.